어머니의 '뽕브라'
어머니의 '뽕브라' 조현세 ㈔도시연대 부이사장 도시계획기술사 2012.10.09 23:30 유년기에 내 시선은 재봉틀에 열중하신 엄마 젖무덤의 흔들림에 멈추곤 했다. 한여름 세모시 적삼을 적시는 엄마의 땀방울보다 젖무덤 사이의 'ㅅ'자를 거꾸로 한 곡선이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일까. 그럴 때면 엄마는 삯바느질 마감으로 분주한 손놀림을 멈추지도 못한 채 물끄러미 서있는 내게 "장승처럼 서 있지 말고 재봉틀 앞에 앉아서 단이나 똑바로 박히게 잡아달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청상과부가 된 뒤 사십여 년을 살아오셨지만 강골(强骨) 기질로 큰 병은 없으셨다. 그런데 어느 날 환갑잔치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에 왼쪽 가슴에 멍울이 크게 잡힌다며 걱정을 하셨다. 대학병원을 찾은 날 의사는 조직 검사도 할 틈이 없다며 서둘러 제거 수술을 권했다. 나 역시 동의서를 썼다. 이제 어머니의 가슴은 더 이상 훔쳐볼 대상도 아니며 어느 누구도 만지거나 봐줄 대상은 더더욱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았다. 책임감을 완수한 아들로서 뿌듯하기까지 했다. 퇴원 후에 나는 어머니의 젖가슴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살았다. 가끔 병원에서 예방 차원의 검진 요령 엽서가 날아왔지만, 그 또한 어머니가 혼자 이십여 년을 해결해 오셨다. 어머니는 여름에도 꼭 내의와 겉옷을 갖춰 입으셨다. 어쩌다 옷을 갈아입으실 때면 문을 슬며시 닫았다. 그런 때에는 '연세도 높으신 분이 어지간히 내외하시네' 하면서 혀끝을 차기도 했다. 외아들이지만 어머니의 유방 한쪽이 없다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채 덤덤하게 살아왔다. 혹여 누가 어머니의 어느 쪽 가슴을 도려냈는지 묻는다 해도 기억조차 아리송한 놈이 되는 사이에 나 또한 환갑이 지나갔다. 그런 삶 속에서 어머니는 자주 다니던 대중목욕탕조차 못 가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오른쪽 팔에 마비가 오고 말았다...